코로나시대의 박사과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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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박 일기

나만 게으르고 나만 안 똑똑한 것 같다

코시박 2021. 2. 5. 15:11

2021년 1월 27일 (수) - 열등감, 비교, 가면 증후군 (임포스터 신드롬)

 

이번 학기의 두번째 주가 되었다. 지난 학기 이맘 때도 느꼈던 것 같은데, 오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업에 들어가서 또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이 수업에서 나만 게으르고, 나만 똑똑하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어드바이저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advanced statistics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총 세 명이다. 같은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intro to quantitative methods 수업이 pre-requisite 이기도 하고, 수업에 학생을 받으실 때나 어드바이저를 받으실 때 까다로운 분이시니 학생 수가 적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개론 수업을 안 들었던 다른 한 친구가 지난 주에 이 수업을 포기하고 가 버리는 바람에 총 세 명의 학생만으로 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이 늘 언제나 꿈꾸던 구성과 수업 분위기가 드디어 조성되었다며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 분야가 무엇인지 선생님께서 구체적으로 알며, 연구에 열정이 있는 소규모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하는 것) 이 수업은 기존의 강의와 연습이 아니라 인디펜던트 스터디처럼 운영하자고 하셨다. 깊이 있은 피드백을 받으며 내 연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또 한 번 생긴 셈이다.

 

이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 소개를 잠깐 해야겠다. 한 명은 원래 질적 연구 (특히 사회 비판과 미디어를 통한 사회 운동 연구)를 하던 동기인데, 이 친구는 지난 학기에 intro to quantitative methods 수업을 나와 함께 들었고, 그 때도 중간고사에서 20점 만점에 21점으로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나 그리고 석사 2년차 친구-이미 advanced statistics를 수강한 친구가 20점을 받았다. 우리 둘이 그 전 수업에 있던 교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이 친구는 한 학기 동안 본인의 질적 연구 관심사를 적용하여 창의적이고 지적으로 도전하게 만드는 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IRB도 쓰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음 배운 통계로 데이터 분석을 하고, 페이퍼를 완성해서 한 학기를 아주 잘 마무리한 케이스였다. 질적 연구의 기본이 탄탄해서 이미 본인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방법론을 더 배우고 적용하는 친구라 정말 똑똑한 친구다.

 

다른 한 명 역시 나의 동기인데, 이 분은 이미 박사님이시다. 다른 분야에서 5년 전 쯤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그때의 연구 논문도 factor analysis를 사용하셨던, 양적 연구 학자이다. 계속 포닥 연구자로 연구일을 하시다가, 취업 시장에서 우위를 갖기 위해, 그리고 본인의 연구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우리 분야의 박사에도 도전을 하신 건데, 어린 자녀를 둘 키우면서 나와 똑같이 두 과목 티칭을 하고, 세 과목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그 외의 연구 (이전 박사 때 어드바이저 선생님과 작업)도 병행하시는 걸 보면 정말로 대단하다. 심지어 사람도 좋아서, 엊그제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본인과 본인 남편 분이 물심양면 나서 도와주신데다 가끔씩 한국 반찬을 챙겨 주시기까지 하시니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소중하고 고마운 인연이다. 첫 학기 때부터 교류를 좀 했지만 지난 겨울 방학 때 단 둘이 같이 우리 분야의 교재를 같이 읽는 스터디를 하면서 좀 더 마음을 열게 되었고, 어제 병원에 다녀오느라 신세를 지고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좀 가까워진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나와 지난 학기 때 부터 아주 친하다고 생각하셨다고 아니었냐고 되물으셨다. 박사과정 생활에 친구는 두 명도 필요 없고 한 명이면 된다고 본인은 나를 찍으셨으니 받아들이라고 하셨다. 유쾌한데 어쩐지 찡하고 내가 그동안 마음을 너무 안 열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마지막은 나인데, 셋 중 유일하게 선생님의 제자이면서 퍼포먼스가 제일 떨어진다. 석사를 하고 그 석사 논문으로 학교에서 우수 논문상을 타고 국제 학회에서 발표를 했는데 지난 학기에 교수님께 받은 피드백을 보니 내가 염려했던 것처럼 부족함이 많은 논문이었다. 논문을 조금 더 수정해서 우리 분야에서 제일 큰 국제 학회에 수정한 페이퍼 완성본을 내 보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샘플링에 큰 문제가 있고, 분석과 글쓰기도 디벨롭해야 한다는 피드백이었다. 석사 첫 학기 때 한국에 들어가서 데이터 콜렉션을 하고 미국에 돌아와서 시간을 들여 쓴 연구가 우리 분야의 다른 국내 학회에서 top paper abstract로 지정되긴 했지만, 이건 full paper가 아니라 abstract다. 지난 늦가을에 하루 이틀만에 적어서 나의 세부 연구 분야에 맞춰 낸 abstract가 채택된 걸 보면, 내 글쓰기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아직은 짧은 글쓰기 (500자 가량)까지인 것 같다.

 

다시 오늘 수업으로 돌아가보겠다. 첫번 째 동기 친구는 겨울 방학에 미리 어떤 연구를 할지 계획을 세워서 첫 수업 시작 전에 교수님께 연락을 해서 여쭤봤던 모양이고, 찾아온 선행연구와 질문지들이 좋아서 추가 IRB를 진행하고 데이터 콜렉션을 한다고 한다. 박사님인 동기분도 오늘 연구 아이디어를 발표했는데, 워드 파일에 정리해서 보여준 두 가지 아이디어가 모두 논리적이었고 그 중 특히 첫번째 아이디어가 교수님의 눈길을 사로잡아 어떤 데이터를 쓰면 좋겠다는 곳까지 나아갔다. 교수님께서 본인의 박사 논문에 썼던 비싼 데이터를 쓸 수 있는 연구 아이디어가 나와서 반색하셨다. 조금 더 자신감이 없어진 상태로 나도 내 연구 아이디어를 발표했는데, 방향은 있지만 만족스러울만큼 디벨롭이 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이야기 하다가 어떤 부분에서는 준비한 것보다 약간 횡설수설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지 알겠다고 하시며, 내가 지금 쓰려고 생각하는 데이터가 나의 이전 연구에서 썼던 데이터보다 현재의 연구 아이디어에 더 적합하긴 하지만, 큰 규모의 데이터이다 보니 질문의 방식이 Yes or no일 때가 많아서 고민해봐야 한다는 피드백을 주셨다. 그리고 나는 여성 연구와 젠더에 관심이 많은데, 이번에도 그 쪽 연구에 초점을 못 맞추고 그 변두리를 아우르자 교수님께서 "젠더를 빠드렸다"고 언급해 주셨다. 사회경제적 상황에 젠더를 넣어 둔 상태였는데, 사실 관심이 있는 세부 영역을 두고 기존 연구들의 근거를 바탕으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논리를 세우지 못해서 비겁하게 돌아가려고 한 것을 지적해 주신 것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늘도 나만 게으르고 안 똑똑하다는 생각에 "나는 이 소규모 수업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또 들고 말았다. 지난 학기 대학원의 첫 오리엔테이션 때, 임포스터 증후군 (가면 증후군) 이라는 단어를 들었는데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 비슷한 것인 것 같다. 그래도 열등감과 불안 덩어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감정의 쓰레기통 삼지 말아야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주기 마련이니까. 아아아. 자기애와 자존감 높았던 나는 어디로 간걸까. 돌아와! 돌아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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